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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수스님의 '사는 게 내 맘 같지 않을 때 힘이 되는 말' - 생사의 고…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항하(恒河-인도 소재 강)의 많은 물은 큰 바다로 흘러 드어가는데 그동안 흐른 물과 너희들이 과거 오랜 동안 나고 죽음을 돌면서 몸을 부수어 흘린 피와 어느 쪽이 많겠는가? 『잡아함』

생사의 고해를 건너는 법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항하(恒河-인도 소재 강)의 많은 물은 큰 바다로 흘러 드어가는데 그동안 흐른 물과 너희들이 과거 오랜 동안 나고 죽음을 돌면서 몸을 부수어 흘린 피와 어느 쪽이 많겠는가? 『잡아함』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법회에 동참한 분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지면 답변이 제각각이다. 사찰 기왓장에 써 놓은 소원처럼 답변이 다양한 것은 불법(佛法)을 믿고 따르는 이유가 같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가운데 ‘깨달음’을 말하는 분에게 그러면 “왜 깨달아야 합니까?” 물으면 머뭇거리지만, 거듭 질문을 던지면 경전 내용을 인용하여 모범 답안을 말하곤 한다. “생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는 분에게 그러면 “정말 다시는 사람 몸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하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즉 좋을 때는 다시 오고 싶지만, 괴로울 때는 오기 싫다는 것이다. 생사의 고통을 만드는 건 자기 자신 좋을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여래가 중생에게 측은한 마을을 갖는 것은 중생이 겪는 고통이 때문이다. 즉 쾌락이 고통인 줄 모르는 중생에게 고통(생사)에서 행복(해탈)으로 가는 길을 직접 보이고 가르치며 타이른다. 이것을 『장아함』 대본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생을 가엾이 여김으로써 이 세상에서 도를 이루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로써 성문(聲聞)을 위해 연설하시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멸한 상태의 진리로다, 거룩한 저 여덟 가지 바른 길로 안락한 곳에 중생을 인도하네. 그러나 중생은 일반적으로 ‘안수정등(岸樹井藤)’ 이야기 속의 나그네처럼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넝쿨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달콤한 몇 방울의 꿀에 취해 그만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린다. 마치 무상한 살귀(殺鬼)앞에서도 욕락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강렬한 유혹에는 대체적으로 독(번뇌)이 있다. 유혹(誘惑)의 혹(惑)자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으로 어리석어 알지 못한다는 의미다. 뭐든지 집착하면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빠져나오기도 힘든데, 더군다나 유혹에 빠졌으니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지 모른다. ‘쳐다보는 것은 괜찮겠지? 냄새 맡는다고 별일 있겠어? 살짝 맛만 보는데 탈이 날까? 하면서 대상에 접촉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황홀해서 꼼짝달싹 못하면 유혹의 덧에 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전에서 ’혹‘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때문이다. ‘혹은 번뇌와 같은 뜻이며 무명(無明)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신심이 번잡하고 어지러운 뇌란의 상태라서 깨달음의 심적 작용을 방해한다.’ 이런 것이 한두 가지라야 억지로라도 벗어나려 해 볼 텐데 미혹은 그 종류도 많고 무엇보다 한번 중독되면 끌려다니는 특징이 있어서 좀처럼 헤어나기 어렵다. 그렇지만 유혹에도 자유자재해서 그것이 좋거나 싫거나 관계없이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속박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리 크고 빠른 배라도 줄에 묶여 있으면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구속하고 무엇으로 얽매는 것일까? 자기 스스로 굴레를 뒤집어쓰고 자신이 만들어 낸 번뇌로 얽어맨 것 외에 달리 그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밖을 둘러보고 뒤져도 찾을 수 없다면 안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면 자기 삶의 주인공은 자신이라서 그렇다. 이런 자신의 모든 행위를 ‘업’이라 한다면 삶의 모습은 그 업을 따른다. 결국 자신의 행위에 따라 생사와 해탈로 나뉘는 것이다. 생사에서 벗어나는 깨달음 해탈과 상대하는 말인 생사를 달리 말하면 윤회다. 그래서 끊임없이 생사를 바다에 비유하고 그 속에서 고뇌하는 것을 ‘생사고해(生死苦海)’라 한다. 『잡아함』 혈경에 생사윤회하면서 흘린 눈물과 바닷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많은지 묻는 내용이 있다. 중생들은 처음이 없이 나고 죽음으로부터 무명에 덮이고 애욕에 목이 매여 과거 오랜 동안 나고 죽음을 반복하면서 괴로움의 맨 끝을 알지 못한다.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항하의 많은 물은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그동안 흐른 물과 너희들이 과거 오랜 동안 나고 죽음을 돌면서 몸을 부수어 흘린 피와 어느 쪽이 많겠는가? 중생이 선악의 ‘인’과 번뇌의 ‘연’으로 윤회하는 것을 분단생사(分段生死)라 하고 보살 등이 원력(願力)으로 생사하는 것을 변역생사(變易生死)라 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면 오고 가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대해서 분분한 의견이 있을 수 있으므로 요약한 『법화경』의 내용으로 하려는 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여래께서 세상에 몸을 나타내시는 것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한 것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開)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부처님의 지경을 보이고자(示),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梧) 하고자, 부처님의 지전에 들어가게(入)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신다.

[김은영 칼럼] 지역문화축제 취소가 능사 아니다 / 부산일보 논설위원

코로나19로 쑥대밭 된 문화축제 ‘안전 우려’ 취소 불가피하더라도 충분한 고민과 협의 후 결정해야   위기 상황일수록 기반 조성 중요 연관 산업·문화예술인 파급력 커 시, 취소 앞서 대안 모색 아쉬워

2일 자 〈부산일보〉에도 실린 충남 보령시의 제23회 ‘온라인’ 보령머드축제 특집기사를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머드축제를 온라인으로 연다고? 어떻게?’라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사전 신청자 1500명(유료)에 한해 우편으로 ‘집콕 머드 체험 키트’를 보내고, 그 머드를 사용해 직접 촬영한 ‘나만의 머드 체험’ 사진이나 동영상을 다시 응모하면 경품을 제공하는 쌍방향 콘텐츠 축제로 풀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해당 축제 홈페이지에는 ‘온택트(온라인-언택트)’형 머드 콘텐츠가 다양하게 소개됐다. 춘천마임축제는 ‘춘천마임백씬(100 Scene) 프로젝트’를 오늘부터 100일간 진행한다. 재래시장, 공공기관, 건물 옥상 등 춘천지역 100곳의 공간이 일상 축제 무대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올해는 코로나19로 행사를 취소하려 했지만, 어려움을 겪는 예술가와 시민이 함께 극복하자는 취지로 열기로 했단다. 당초 9월 개막 일정이던 춘천인형극제는 아예 두 달을 앞당겨 4일부터 시작한다. 코로나19로 인한 문화예술계의 위기는 거의 재앙 수준이다. 시민들도 문화예술행사에 목말라한다. 지역문화축제의 변신이 기대되는 이유다. 세계 무형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 역시 2020년 행사는 ‘온라인’ 꼬리표를 달고 진행됐다. 핵심 행사인 단오굿은 전문가 해설까지 곁들여져 실시간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SNS에선 실시간 댓글 소통이 이뤄지고, 단오 음식인 ‘수리취떡’과 ‘단오주’가 선물로 배달됐다. ‘단오체험팩’은 신청 이틀 만에 동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위기는 기회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보령머드축제, 춘천마임축제, 강릉단오제에 눈길이 간 건 최근 부산시가 전격 취소한 제25회 부산바다축제와 21번째 부산록페스티벌과 무관하지 않다. 비록 온라인이지만 그들은 행사를 여는데, 부산은 전면 취소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만약 그것이 문화관광축제를 지원해야 할 부산시, 즉 행정 탓이라면 간단치가 않다. 부산시로선 “코로나19의 감염 예방 및 확산 방지를 위해” 대규모 행사 취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시민 안전만큼 중요한 건 없을 테니 말이다. 아쉬운 건 취소 과정의 씁쓸함이다. 두 행사를 주관하는 “부산문화관광축제조직위원회와 논의 끝에”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시는 보도자료를 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축제조직위는 어떤 방식이든 축제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할 수 있는 새로운 축제를 고민했고, 형식도 좀 바꾸자고 제안했단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줄폐업의 위기에 놓인 공연업계 현실도 반영되지 않았다. 다른 국제행사를 여는 모 사단법인에선 사무국 운영비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 “전원 일괄 사표 후 돌아가면서 실업급여를 받고, 다시 사무국으로 복귀한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대안은 없었을까. 문화예술관광축제는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시의 취소 결정이 좀 더 신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에 더해 오늘부터 5일까지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실내외에서 열리는 ‘2020 부산푸드필름페스타’나 오는 7~15일 개최하는 제15회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는 규모를 줄이고 형식을 약간 바꿔 예정대로 개최한다니 형평성 논란마저 인다. 끝내 행사가 취소되더라도 합당한 기준이 제시되고, 충분한 논의 과정이 있었더라면 축제 관계자와 문화예술인들이 이렇게 속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령머드축제를 주관하는 보령축제관광재단(이사장 김동일 보령시장)이라고 왜 고민이 없었을까. 그들은 축제를 만드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 모두를 배려해 온라인 축제라도 열기로 했다. 부산시도 대책 없이 행사를 중단할 게 아니라 보다 안전한 방역체계를 고민하고, 온오프라인 병행 등 창의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뤘더라면 더 좋았을 듯싶다. 독일 문화부 장관 모니카 그뤼터스는 “문화가 결코 좋은 시절에만 누리는 사치품이 아니라, 인류의 표현 방식”이라면서 “위기의 시기일수록 예술가들이 창조적인 힘을 발휘해 왔으며 이런 전례 없는 상황에서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한 문화와 미디어 지형을 지켜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염병 위기 상황에서도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관이 취해야 할 첫 번째 예술정책 전략인 셈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축제는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모색이 필요해졌다. 거듭 말하지만, 코로나19로 지역문화축제를 취소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축제의 옷을 어떻게 바꿔 입을까를 고민할 때다. 코로나19가 예술에 던진 질문에 우리가 답할 차례다. 이제는 축제도 변해야 살아남는다. key66@busan.com [출처: 부산일보]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0070218575684237

범수스님의 '사는 게 내 맘 같지 않을 때 힘이 되는 말' - 자비의 참…

남을 죽여 저를 살린다면 재앙이 끝없을 것이고, 자비로워 죽이지 않을 때는 세세생생 근심이 없으리라. 『법구비유경』

자비의 참뜻 남을 죽여 저를 살린다면 재앙이 끝없을 것이고, 자비로워 죽이지 않을 때는 세세생생 근심이 없으리라. 『법구비유경』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불교 용어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용어에 대한 정의 때문이다. 하나의 용어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보면 생각과 표현이 달라지고 이로 인해 오해도 생긴다. 그러한 용어 가운데 하나가 ‘자비’다. 자비를 ‘방관’ ‘외면’ ‘회피’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만큼은 자비라는 이름으로 무조건적인 관용을 요청하기에 그렇다. 본인의 잘못을 모른 척하거나 눈감아 주면 대단히 자비롭다고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무자비하다고까지 말한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이 또한 중생심의 한 단면이다. 잠깐 화제를 딴 곳으로 돌리면, 세상 사람들은 수행자를 어떻게 보는지 몰라도 수행자들은 그들의 소원이 이뤄지도록 축원하는 입장이라서 상대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등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어느 한쪽에 치우쳐 누군가를 예뻐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평등하게 행복을 축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정책과 격려를 통해 두루 원만하게 공적을 쌓게 할 뿐이다. 이것이 곧 평등에 바탕을 둔 ‘자비’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기 종교의 스승에게 듣기 좋은 말을 들었다고 해서 우쭐거리거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서운한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다시 ‘자비’와 ‘무자비’로 돌아가서 이야기해 보자. 자비는 중생을 올바르게 구제하려는 노력 국어사전에서는 자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 어쩌면 이런 식의 단편적인 설명 때문에 자비의 개념이 와전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자비의 개념을 불교사전에서 조금 더 살펴보자. 자비(慈悲)에서 ‘자(慈)’란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란 고통에서 구제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선한 행위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이고, 악한 행위자에게 더 이상 악업을 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비’라는 뜻이다.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다. 그릇된 지혜를 지닌 중생에게 대비(大悲)를 일으키며, 악한 행동을 하는 중생에게 대비를 일으킨다. 그렇게 때문에 ‘중생의 고통을 보고 듣고 구원한다’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도 중생의 악행에 대해서는 찡그린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평등한 입장에서 중생을 구제하려는 방편이다. 십일면관세음보살은 꽃과 부처님 얼굴, 즉 불면(佛相)으로 장식된 화관을 쓰고 있다. 불면 가운데 정면은 미소(慈)를 띤 반면, 왼쪽은 눈을 부릅뜬(悲) 형상이다. 항상 온화한 자비의 미소만 지을 것 같은 관세음보살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말은 어쩌면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엄연히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 그것은 악행을 저지르고 고통받는 중생을 악의 굴레에서 구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악행을 일삼는 자에게 먼저 비(悲)로 제도한 후, 자(慈)로 구호하는 것이다. 즉 악행을 그치게 한 뒤 공덕을 쌓게 하는 것으로 악행을 보고서도 구제하지 않거나 외면하는 것이 ‘무자비’다. 따라서 ‘자비’란 선악을 구분할 줄 몰라 고통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심은 이와 다른 것 같다. 잘못된 것이라도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옳은 것이라도 손해가 되면 싫어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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